노동시간을 화폐처럼 사용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 오늘은 "시간을 돈처럼 쓰는 도시" 스페인의 '타임 뱅크' 실험을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당신의 1시간, 나의 1시간” – 타임 뱅크란 무엇인가?
“돈 없이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이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된 혁신적인 실험이 바로 타임 뱅크(Time Bank)다.
타임 뱅크는 말 그대로 시간을 은행처럼 예치하고 인출하는 시스템이다.
돈 대신 노동 시간을 단위로 삼고,
내가 누군가에게 1시간 동안 도움을 주면
그 1시간을 통장처럼 적립해두고,
다른 사람이 내게 1시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권리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의 아이를 2시간 동안 돌봐줬다면
그 2시간은 타임뱅크에 적립되고,
그 시간으로 당신은 다른 회원에게서 컴퓨터 수리를 받거나
청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시스템은 화폐 중심 사회가 놓치는
인간 중심의 상호 돌봄, 공동체성,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돈이 없거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시간’이라는 모두가 평등하게 가진 자산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실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는 유럽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타임 뱅크 시스템이 운영된 도시 중 하나다.
2000년대 초반, 스페인은 경제 위기와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고,
젊은 층과 은퇴자, 육아 여성들처럼 공식적인 노동시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생산적 활동을 하고 싶어도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이에 바르셀로나 시는 지역 단위로
TimeBank.cc와 같은 조직을 만들고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한 주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요가 수업 1시간을 제공했고,
그 시간만큼 타임뱅크에 적립되었다.
이후 그는 다른 회원으로부터 정원 손질 서비스를 받거나,
공예를 배우는 수업을 무료로 들을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나이가 많거나 경제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인층의 사회적 고립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단순한 자원 교환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통로가 된 것이다.
2020년 기준으로 바르셀로나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타임 뱅크가 30여 개 이상 존재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간을 주고받는 방식은
노동력의 재해석을 시도한 의미 있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돈이 아닌 가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
타임 뱅크 시스템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모든 사람의 시간이 동일한 가치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변호사의 1시간이나, 정원사의 1시간, 요리사의 1시간 모두 동일하게 ‘1시간’이다.
이는 기존 자본주의가 가진 직업에 따른 가치 차별을 없애고,
모든 노동을 평등하게 인정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실험에도 도전과제는 있다.
우선, 사회가 오랜 시간 ‘금전 중심의 교환 체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을 돈처럼 신뢰하고 거래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시스템 운영을 위한 기록, 매칭, 공정성 확보 등의 관리 문제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임 뱅크는 우리에게
“돈 없이도 경제가 가능할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이상주의를 넘어서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유용하게 기능할 수 있는 대안 경제 시스템으로
실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시스템은
‘나눔과 돌봄’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경제의 중심에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실 역할을 해왔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한 개인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자신의 시간을 나누는 사회.
돈보다 더 따뜻한 경제가 실현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진짜 돈이 될 수 있을까?
스페인의 타임 뱅크 실험은
“시간은 곧 돈”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가진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 나 자신도 도움받을 수 있는 자산이 될 수 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묻는다.
경제의 중심이 ‘돈’이어야만 하는가?
만약 ‘신뢰’와 ‘서로 돌봄’이 중심이 된다면,
우리는 훨씬 덜 경쟁적이고 더 따뜻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타임 뱅크와 같은 실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